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캄보디아-베트남 전쟁 (문단 편집) === 군사 측면 === 1978년 12월 25일, 중포병과 공군의 지원 하에 13개 사단으로 구성된 베트남군 15만명이 캄보디아를 전면 침공했다. 크메르 루주는 재래전으로 베트남군에 맞섰고 그 결과 2주만에 병력의 절반을 잃는 참패를 당했다. 크메르 루주 지도부는 급하게 서쪽으로 피난했고 이듬해 1월 7일 베트남군은 무주공산이 된 [[프놈펜]]을 점령했다. 다음날 베트남의 괴뢰정권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 프놈펜에 수립되었다. 베트남군은 거침없이 진격하여 17일에는 태국 국경과 맞닿은 캄보디아 남서쪽 코콩(Koh Kong)을 함락하여 캄보디아 전역을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이것은 '''베트남의 '[[베트남 전쟁]]''''으로 가는 첫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에서 신속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얼마 안 가 캄보디아와 국제사회의 반발에 부딪혀야 했다. 정글로 쫓겨난 크메르 루주는 물론이고 전 국왕 [[시아누크]]가 조직한 중립성향 반월 조직 '민족통일전선(FUNCINPEC)', 전 수상 [[손 산]]이 조직한 반공 성향 반월 조직 '크메르인민민족해방전선(KPNLF)'이 괴뢰정부와 베트남에 맞섰는데 그들 중 숫적으로 가장 거대한 조직은 역시 크메르 루주로 1984년 당시 3만~5만의 병력을 자랑했으며 그 뒤를 KPNLF(1만 2천~1만 5천)와 FUNCINPEC(5천)이 차례로 이었다. 베트남은 1981년 말부터 태국-캄보디아 국경지대에서 반월 빨치산의 [[게릴라]]전에 시달리게 되었다. 캄보디아의 날씨는 크게 5월~10월 사이의 우기, 그리고 11월~4월 사이의 건기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베트남군은 건기에 공세를 수행했고 크메르 루주는 우기에 주도권을 잡았다. 1982년 베트남군은 캄보디아 북서쪽의 프놈말라이(Phnom Malai)와 남서쪽의 카르다몸 산맥(Cardamom Mountains)의 크메르 루주 기지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벌였으나 실패했다. 이렇게 서쪽 국경지대가 전쟁에 빠져들자 자연히 이 지역에서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통치력도 약화되었다. 이에 베트남은 1984년부터 대대적인 반월조직 토벌에 착수했다. 7월 19일 베트남은 국경지대 게릴라의 활동을 제약하기 위해 K5계획(K5 Plan)을 실행하였다. 이 계획은 게릴라를 은폐하는 열대림을 대거 벌채한 다음 그 자리에 철조망과 참호를 설치하고 대전차 지뢰와 대인 지뢰를 살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역 특성상 나무를 베어내도 어차피 1년만 지나면 다시 사람 키만큼 나무가 자라기 때문에 별 효과는 없었다고 하며 이때 대량으로 살포한 지뢰는 오늘날까지도 캄보디아인들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고 있다.] 11월에는 6만명의 병력이 동원된 대규모 작전을 벌여 크메르 루주와 KPNLF의 박멸을 시도했다. 이듬해 3월 베트남군은 양대 조직의 주요 기지를 모두 점령하고 병력의 1/3을 격멸했음에도 불구하고 게릴라전은 이어졌고 심지어 1987년에는 베트남과 가까운 중부 지역에서도 게릴라들이 활동했으며 베트남군이 국경지대의 크메르 루주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인근의 [[태국군]]과 끊임없이 [[베트남의 태국 국경 습격|교전]]이 벌어졌다.[* 교전 자체는 1979년부터 간헐적으로 벌어졌지만 1985년에 특히 빈번하게 벌어졌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괴뢰정권을 수립하고 군사적 우위를 누렸지만 그 댓가로 막대한 군비지출과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캄보디아 주둔군은 괴뢰정권이 자립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섣불리 철군할 수도 없었다. 전면전은 1979년 1월에 사실상 끝났지만 주둔군은 오히려 20만까지 늘어났고 1982년 일방적인 철수를 발표한 후에도 1984년 18만명, 1988년 10만명이 주둔했다. 게다가 중국 국경지대와 라오스에도 각각 25만 명, 4만 5천명을 배치했다. 당연히 감군은 언감생심이었고 1987년에도 총 126만(육군 110만, 해군 4만, 공군 12만)에 달하는 대군을 유지했다. 베트남 경제는 캄보디아 전역 및 중국과의 국경분쟁과 그에 따른 막대한 군비지출,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실패와 국제적 고립으로 80년대 내내 정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